전체 글251 [영국]#16_엘리자베스 1세 즉위하다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의 유년 시절은 이복언니였던 메리 여왕과 마찬가지로 불행했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고, 어머니는 런던탑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몸에 맞는 옷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소외된 성장기를 보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21세가 되던 해에 가톨릭교도였던 '피의 메리'는 신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런던탑에 가두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서 비바람이 치는 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밤새 숨죽여 울기도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1세(1553~1603)로 왕위에 오른 후, 그녀는 어떤 경우에도 언니 메리처럼 포악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지혜와 관용을 보여줌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 정치 .. 2024. 7. 2. [영국]#15_종교개혁 이후 1558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되다 헨리 8세와 영국의 종교개혁 헨리 8세의 교황의 허가 없는 이혼에 대한 보복으로 교황은 헨리 8세를 파문해 버린다. 어제의 동지가 하루아침에 적이 되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헨리 8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내친김에 국왕이 곧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모체)의 최고 수장이라는 수장령을 선포했다. 다분히 희극적이지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렇듯 국왕이 이혼 문제로 교권에 도전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는 마치 삼류작가가 쓴 연애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로, 하나님과 성서의 신성한 소명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우스꽝스러운 종교개혁으로 인해 무고한 희생자가 생겨났다. 그가 바로 '유토피아'를 저술한 토머스 모어였다. 모어는 헨리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국교회의 최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데 반대 .. 2024. 6. 27. [영국]#14_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튜더 왕조의 왕권 강화 웨일스를 정복한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의 수렁에 빠져 10여 년을 허우적대다가 결국 프랑스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장장 100년이 넘게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자랑스럽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1453년에 백년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2년 만에 잉글랜드는 양대 귀족 가문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내전에 휩싸였다. 이는 '장미전쟁'이라는 낭만적인 이름 때문에 자칫 여자나 애정에 얽힌 전쟁으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장미 문장을 사용하는 두 가문이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다. 30년에 걸친 내전 동안 잉글랜드의 왕관은 귀족들의 단두대라고 할 만큼 많은 희생을 치르며 네 명의 머리 위를 전전하게 되었다. 결국.. 2024. 6. 26. [영국]#13_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영국 의회의 발전 과정 에드워드 1세와 스코틀랜드 1296년,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전쟁을 벌인 후 스코틀랜드의 보물인 대관식용 스콘석을 빼앗아 왔다. '리아 파르'라고 불리는 이 성스러운 돌은 1998년에 이르러서야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로 반환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에 복속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에드워드 1세에 대한 스코틀랜드인의 원한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뿌리가 깊다. 이는 1995년에 나온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에드워드 1세는 부왕인 헨리 3세가 겪었던 수모를 보면서 귀족들이야말로 왕권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라는 생각을 품었다. 그는 시몽이 왕권을 제한하기 위해 만든 의회를 오히려 귀족 세력을 제한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귀족이 장악하.. 2024. 6. 25. [영국]#12_영국 의회의 탄생 과정 영국 의회의 탄생 오늘날 영국의 소도시 옥스퍼드는 옥스퍼드 대학교로 잘 알려져 있다. 매년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지만, 이 작은 소도시가 영국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던 곳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258년, 헨리 3세는 시칠리아 원정에 필요한 군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옥스퍼드에서 대규모 의회를 소집했다. 하지만 헨리 3세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은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윽고 헨리 3세의 매부였던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무장한 7명의 귀족을 대동하고 궁정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헨리 3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는 대신, 왕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된 '옥스퍼드 조례'에 조인할 것을 요구했다. 국정개혁안인 이 '옥스퍼드 조례'에 .. 2024. 6. 24. [영국]#11_<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2) '마그나 카르타'에서는 다음의 세 가지 조치가 핵심적이다.첫째, 국왕이 국민에게서 돈을 얻어내는 통로를 차단한다. 즉, 국가가 함부로 돈을 징수하지 못하도록 제한 장치를 마련했다.둘째, 국왕의 판결은 공평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사법적 형평성을 주장했다.셋째, 지방 관리 및 제후 세력들의 압제를 없애고자 했다.'마그나 카르타'의 판본 '마그나 카르타'에는 총 4가지 판본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1215년에 작성된 문건으로 존 왕과의 타협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존 왕은 이 협의를 무시하고 '마그나 카르타'의 무효를 주장하며 또다시 내란을 야기했다. 1216년 존 왕이 죽고 겨우 9세밖에 되지 않은 존 왕의 아들인 헨리 3세가 즉위한 뒤 새로운 '마그나 카르타'를 반포하게 된다. 그러고.. 2024. 6. 23. [영국]#10_존 왕의 죽음과 <마그나 카르타>의 이모저모(1) 존 왕의 최후 존 왕은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할 때만 해도 이를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저 시간을 벌어보려는 속셈으로 타협에 응했다. 존 왕은 재빨리 교황의 지지를 얻어 '마그나 카르타'가 불법임을 선포했다. 그러고는 또다시 내란을 일으켰다. 존 왕은 이번에도 외국 용병을 고용하여 왕궁을 지켰지만, 민심을 잃어버린 왕에게 승산은 없었다. 1216년 5월, 반란 세력은 런던에 진입했고, 누구도 국왕 편에 서는 이가 없었다. 그해 10월 18일, 막다른 길에 몰린 존 왕은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존 왕의 일생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지막 생애 1년은 왕권을 지키기 위한 그의 신념이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존 왕은 결코 '마.. 2024. 6. 22. [영국]#9_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확립한 <마그나 카르타> 마그나 카르타, 영국 정치의 정체성을 잡다 1215년 6월 15일, 템스강변의 러니미드 초원에서 존 왕과 귀족 대표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여기에서 역사적으로 중대한 결과가 도출되었다. 존 왕이 국왕의 권력을 제한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문서에 조인한 것이다. 귀족들이 랭턴 대주교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이 문서에 대해 존 왕은 불만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결국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집행인 자격의 남작 25명과 함께 공동으로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문서가 바로 우리에게 '대헌장'으로 알려진 '마그나 카르타'이다. 마그나 카르타 자체에는 새로운 요구사항은 없었다. 다만 윌리엄 1세 때부터 200여 년에 걸쳐 불문율로 내려온 국왕과 귀족들 간의 계약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한 최초의 법률문서였.. 2024. 6. 21. [영국]#8_왕권이 하락되고 귀족의 권한이 향상된 과정 증세 또 증세 존 왕은 잉글랜드에서 차츰 군비를 확대하고 임의로 세수를 늘리는가 하면, 귀족들의 영지를 자기 재산처럼 마음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기존의 봉건적 규범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였다. 기록에 따르면, 존 왕은 이때 병역면제세를 16배, 귀족들의 영지상속세를 100배나 올리고 동산에 대한 세금은 배로 늘렸다고 한다. 그는 또 상업세를 신설해 모든 수출입 화물의 가치에 따라 그 15분의 1을 세금으로 물리기도 했다. 교회도 더 이상 성역은 아니었다. 존 왕은 교회에까지 손을 뻗쳐 1209~1211년의 3년 동안 교회 수입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이 2만 8,000파운드에 달했다. 소, 양, 보리의 값도 배 이상 껑충 뛰었다. 이것이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기록된 인플레이션일 것이다. 이렇듯 갈수록 .. 2024. 6. 20. 이전 1 ··· 4 5 6 7 8 9 10 ··· 28 다음